어느 이방인의 일기 (석사과정 신입생 A)
오늘 연구실 생활을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어제부터.
진학 준비 시기에 기대했던 바를 포함하여, 짧게나마 사람들을 만난 이야기들까지.
관찰자의 시선에서, 또는 나만의 생각으로 이를 풀어 나가보려 한다.
Q1 어떤 기대로 대학원을 진학하게 되었는가 [기대감]
내 소개를 간략하게 하자면 직장을 다니면서 수업을 듣게 되는 파트타임 대학원생이다.
방구석에 혼자 있는 외로움에서 사랑의 욕구가 시작되듯, 반복되는 회사생활의 권태로움과
이루어 낸 것 없이 나이만 먹어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 시작이었다.
대학원 진학은 무엇을 위함이었을까. 자기소개서에는 명분 가득한 모범적 답을 작성했지만
합격한 뒤에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하자니 가슴이 갑갑해졌다.
분칠을 벗기어 내니 최고의 교육기관에서 학위 받는다는 허영심. 그것이 근원적이었다.
우수한 교수님들의 지도, 뛰어난 학생들과의 교류, 자기 연구 주제에 대한 발전, 진리의 탐구
등등 몇 가지고 써내려 갈 수 있지만 나의 솔직한 심정을 저열하다고 손가락질해도 좋다.
다만 왕관을 얻기 위해서는 그 무게에 맞는 시련이 동반한다는 것을 간과했다.
Q2 기대와 다른 점, 발전한 부분 [다른점, 발전]
나는 보았다. 1박 2일의 워크숍 후 피로한 몸을 이끌고 바로 과제를 하는 연구원들의 모습을.
주말 저녁까지도 불이 켜져 있었던 연구실의 모습을.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그들의 모습에서
발전과 성장에 관한 설명은 아름다운 말로 듣기 좋게 꾸민 글귀에 불과할 것이다.
소위 대학 생활이라 함은 동아리 활동을 참여하고 축제를 즐기는 시트콤 상의 환상이 있었다.
하지만 대학원 생활은 위와 같이 지식 창출을 위하여 주말 밤낮 없이 헌신해야 한다는 것을
본보기가 되는 행동으로 나의 어리석음을 일러주었다.
어려운 내용과의 힘겨운 과제를 견뎌내면서 생기는 지구력과 인내심을 저평가 해선 안된다.
운동선수들이 각 분야의 기술을 익히기 전에 그에 맞는 체력을 키우는 훈련에 땀을 쏟듯이
지식 체계를 세울 수 있는 지적 인내력은 대학원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발전일 것이다.
Q3 대학원과 학부와의 차이점 [vs 학부]
나는 늘 동경해왔다. 수라는 언어로 저 너머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는 수학자들을.
그리고 미적 감각으로 재료들을 조화롭게 쌓아올려 오랫동안 흔적을 남기는 건축가들을.
덧붙여 지식의 뼈대를 세워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도 같은 선상의 예술이라 부르고 싶다.
교수님의 말씀을 녹음 후 완벽히 암기하여 A+을 받았다는 학부생의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고등학교 내신이나 방대한 기본 지식을 채워야 하는 분야에서는 그 방법이 맞을지 모르겠다.
다만 그저 많은 블록만으론 담벼락정도 완성할지라도 보다 높은 단계의 작품은 불가능하다.
같은 재료로 미슐랭 3스타를 받는 음식점이 있는가 하면 금방 폐업하는 음식점이 있다.
그리고 설계도의 배치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이 탄생한다. 이러한 차이점을 자각하고
장인들의 지도로 자신만의 기술을 익혀가는 도제식 교육이 대학원의 바탕이라 생각한다.
Q4 대학원에 오기 전에 해야할 각오? [각오]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 핵심어일 것이다. 구속 없이 수학할 수 있음은 대학원의 장점이지만
자기가 맡아서 마땅히 해야 할 직분에 대한 책임이 결여된다면 동시에 치명적 단점이 되고
결국 발전 없이 정체되고 만다.
영어, 글쓰기, 발표 등 필수적으로 개발 할 능력들이 있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들에 앞서서
헤쳐 나가야 할 일들을 대하는 마음가짐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생각을 바꾸면 말과 행동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결과물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상술된 밤낮 없이 연구에 헌신하는 태도, 그에 따르는 지구력과 인내심은 대학원에 적을
두었다고 거져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대가를 각오한 자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하루빨리 미몽에서 깨어나 대학원 생활에 진지하게 임해야 할 것이다.
Q5 책임과 의무에 관하여 [책임과 의무]
탐험가 마르코폴로는 현지 적응하여 관찰 내용을 담은 동방견문록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반면 오만했던 대항해시대 선원들은 엘도라도를 꿈꾸었으나 현지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만들지
못하여 먼 타지에서 고생만 하고 소득 없이 배고픔에 굶주렸다.
적지 않은 비용과 황금 같은 시간을 투자하면서 낭만과 멋을 찾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들 더 나은 직장을 위해서, 상위의 학위를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젊은이들이 모인 곳이었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준비되지 않았으니 행동에 드러나 크고 작은 실수를 반복하기 마련이었다.
기존의 구성원들과 물리적 형태가 다르니 화학적으로도 쉽게 섞이지 않을 것은 당연하지만
간격을 좁혀 나가는 것이 신규자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이 어리석은 이방인은 그 관문을 통과
하지 못했으나 이 글을 보는 다음 여행자여,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길 바란다.
Q6 대학원의 경쟁력 [경쟁력]
서울대 환경대학원은 전문대학원으로, 전문 분야의 인력양성과 그에 따른 이론 및 학술연구를
주된 교육목적으로 하여 일반대학원과 차이가 있다. 동일한 학부 출신이 주류가 되지 않고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는 점을 강점으로 꼽을 수 있겠다.
졸업생들이 학술, 연구기관, 공공기관, 민간기업에서 역할을 다하는 것을 보면 어떤 업무에도
능히 대처할 수 있는 인재가 된다는 뜻이다. 다만 스스로 성과를 내려는 열망이 없다면
학문을 탐구하는 대학원 본연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개인 휴식시간을 포기하고 학업에 전념해야 하는 길을 나선 것에 대한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
이 선택이 나를 옭아매는 족쇄일지, 아니면 인생의 또 다른 모험이 될지 걱정과 기대가 섞인
복잡한 심경으로 오늘 일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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